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도 국민 회의 (문단 편집) == 연혁 == [[파일:external/indiatogether.org/rgh-congress.jpg]] 영국의 식민통치 시절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 등이 지도하는 독립운동 단체로 시작했고[* 설립 초기에는 친영국 성향의 단체였지만 1905년 벵골 분할령을 계기로 반영국 독립운동 단체가 되었다.], 독립 이후부터는 정당으로 탈바꿈했다. 특히 인도의 독립운동가 겸 초대 수상이기도 한 [[자와할랄 네루]]를 시작으로, 그의 딸 [[인디라 간디]]와 그녀의 아들 [[라지브 간디]]과 며느리(소니아 간디), 손자([[라훌 간디]])까지 네루의 후손들이 4대째 당 지도부를 차지하고 있어서 '네루-간디 당'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2017~2019년 당 총재로 재임한 [[라훌 간디]](1970년생)도 네루의 외증손자이자 인디라 간디의 외손자다. 참고로 인도 국기의 삼색은 본래 이 정당의 깃발에서 유래한 것이다.[* 파란색 수레바퀴는 인도 최초, 최고(最古)의 비문인 [[아소카 왕]]의 석주의 사자상에 새겨진 문양이다. 이 사자상은 현재 인도의 [[나라문장|국장]]이다.] [[중화민국]]의 국기인 [[청천백일만지홍기]]가 [[중국 국민당|국민당]] 당기에서 유래한 것과 비슷한 사례. 1945년부터 1977년 총선 때까진 그때까지 쭉 [[일당 우위 정당제|장기집권해오던 여당]]이었다. 하지만 3차 경제계획이 예상보다 저조한 성과를 거두고 필요성은 있었다지만 무리하게 진행된 산아제한 정책[* 허나 반발만 엄청나게 컸고 출산율 저하는 없었다.] 등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본인도 당선무효형으로 총리직을 내려놓게 생기자 [[인디라 간디]]는 75년 계엄령을 선포, 77년까지 정적 탄압 등으로 불만을 강하게 억눌렀고 결국 반발이 거세지면서 1977년부터 1980년까지는 잠깐 야당이 되었다. 허나 당시 인도의 집권당이 인디라 간디를 끌어내리기 위해 좌에서 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세력이 연합한 짬뽕 세력이었기 때문에 얼마 안가 내분이 일면서 1980년 총선에서 인도국민회의가 다시 압승을 거두며 정권에 복귀했고, 인디라 간디가 1984년에 암살당하고 12월까지 추모열기가 유지되면서 국민회의는 엄청난 압승을 거두었다. 이후 1989년에 정권을 상실하지만 1991년 총선에서 유세 중이던 인디라 간디의 아들인 [[라지브 간디]] 총리가 스리랑카 반군에 의해 폭탄 테러로 사망하면서(...) 추모 열기로 다시금 집권할 수 있었다. 1991년부터 집권한 [[P. V. 나라심하 라오|나라심하 라오]] 총리는 폐쇄적이었던 인도 경제를 개방 경제로 이끌었고, 1996~2003년까진 [[인도 인민당]]이 성장하면서 야당 신세가 되었다가, 2004년 총선에서 다시 집권하면서 [[만모한 싱]] 총리 체제 아래 인도의 고도성장을 이끌었다는 평을 듣게 된다.[* 이때 인도국민회의의 총재는 라지브 간디의 미망인 소니아 간디였지만, 그녀는 이탈리아 출신의 귀화 외국인이었기에 총리 자리에 직접 앉지 않고 경제전문가 만모한 싱을 막후에서 지원하는 포지션을 취한다.] 덕분에 2009년 재집권도 했지만 2010년대 초중반 들어 성장이 정체되면서 2014년에는 다시 야당으로 밀려난다. 이후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이끄는 [[인도 인민당]]의 힌두교 근본주의식 극우화에 위기감을 느낀 지지자들이 다시 결집하면서, 우선 2018년 12월 7일의 [[라자스탄]] 주 선거[* 인도에서는 주의회 지방선거일이 주마다 다르다.]에서 인도 인민당을 누르고 110~140석 사이의 자리를 가질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고, 2019년 총선도 여론조사에 따르면 정권교체까진 아니어도 개헌 저지선을 확보할 정도는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실제 인도 인민당도 2010년대 중후반 경제성장을 이끌었지만 하필 총선을 앞두고 다시 경기침체가 와 인도의 실업률이 45년만에 최고치를 기록하는 등 국민회의로선 호기가 찾아왔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겨우 52석을 건지는 대참패를 당했고, 당수인 [[라훌 간디]]는 자신의 정치기반인 [[우타르프라데시]] 주 아메티 지역구까지 [[인도 인민당]]에 뺏기는 굴욕을 당한다. 이 지역구는 과거 어머니 소니아 간디의 지역구이기도 했고, 심지어 큰아버지 산제이 간디와 부친 [[라지브 간디]]의 지역구이기도 한 곳이라 라훌 간디에게는 상징성이 엄청나게 큰 곳이다. 그런데 이 곳을 인도 인민당에게 내준 것. 그나마 [[케랄라]] 주에서 당선되어[* 인도는 한 후보가 2개의 선거구에서 출마하는 것이 가능하다. 2014년 선거에서 [[나렌드라 모디]] 역시 본인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구자라트]] 주 및 [[우타르프라데시]] 양쪽에서 출마했고, 둘 다 당선되어 구자라트의 지역구를 내려놓은 바 있다.] 정치생명이 끝나지는 않았지만, 정치 리더로선 치명타를 입었다. 이렇게 된 요인으론 당수인 [[라훌 간디]]의 리더십과 비전 부족, 네루-간디 가문의 이름만 강조하는 식상한 선거전략, 어머니 소니아 간디에게 휘둘릴 수 있다는 우려 등 내외부의 곪은 살을 결국 제거하지 못한 대가가 크다는 것이 거론된다. 실제 정당 성향과는 별개로 다이아몬드 수저라 할 수 있는 라훌 간디에 비해 정적인 [[나렌드라 모디]]는 비록 힌두 극우 정당인 인도 인민당 출신이라곤 하나, 짜이 행상으로 자수성가해 총리 자리까지 올랐고, 대통령인 [[람 나트 코빈드]] 역시 [[불가촉천민]] 신분으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것과는 극명히 대비된다. 또 극단적인 인도민족주의자 입장에서 보자면 라훌 간디가 외국인과 혼혈[* 어머니 소니아 간디가 [[이탈리아]] 출신이다.]인 것도 탐탁친 않았을 것이다. 그 외 선거 직전 [[2019년 인도-파키스탄 분쟁|인도-파키스탄 분쟁]]이 터지면서 공군이 국지적 전투를 벌이며 국민을 자극할만한 안보 이슈가 주요 선거 변수로 부상한 것도 국민회의 입장에선 별로 득될 게 없는 국면이었다. 결국 2019년 총선 이후 [[라훌 간디]] 대표는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났으며, 그 자리는 모친인 [[소니아 간디]]가 대행하고 있는데 한동안은 새로운 당대표를 뽑지 않고 있다. 참고로 라훌 간디에겐 [[프리양카 간디]]라는 여동생도 있는데, 이 여동생 역시 정계에서 활동 중이다. 2020년 8월엔 당내 인사 일부가 간디 가문에, 좀 더 당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든지 아니면 아예 빠지든지 결단을 하라며 개혁을 요구하기도 했다. 일단은 [[소니아 간디]]가 임시 대행을 맡는 것으로 유지되는 모양새.[[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1836351?sid=104|#]] 2022년 10월, 드디어 네루-간디 가문이 아닌 사람이 대표가 되었다. 다만 새롭게 당대표가 된 [[말리카르준 카르게]]는 이미 80세의 고령인 인물이고 네루-간디 가문과 매우 친밀한 인물이기 때문에 라훌 간디가 소위 '바지 사장'으로 내세운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https://m.khan.co.kr/world/asia-australia/article/202210201417011#c2b|#]] 신지도부 출범 이후 2023년 2월, 인도 북동부인 [[트리푸라]], [[나갈랜드]], [[메갈라야]]에서 열린 지방선거에서 참패하면서 당세 축소가 다시 한번 확인됐지만 5월 10일에 열린 남인도 [[카르나타카]] 주의회 선거[* 카르타나카 주의회 선거 역사상 최고 투표율인 73.19%를 기록할만큼 관심도가 높았다.]에서 출구조사 평균을 넘어서는 결과인 단독 과반을 확보(135석)하며 선거 연패를 탈출, 반등점을 마련했다. 특히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선거 기간 중 20번이나 방문해 유세를 도울만큼 상대 인도 인민당에서 상당히 공력을 기울였던 곳에서 반격에 성공한만큼 그 의미가 더 컸다. 차회 총선 여론조사에서도 모디와 BJP의 집권을 무너트릴 정도는 아니지만, 100석 이상의 의석을 확보해 제1야당으로서 견제할 힘을 회복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